티스토리 뷰

자신만만하게 시작한 대작
소품은 어느 정도 그렸고, 초보 딱지도 뗐을 무렵 내 눈에 들어온 건 일월오봉도였다. 마침 공모전을 준비하던 시기였고, 선생님이 어떤 사이즈로 그릴 거냐고 물으셨다. "차에 들어가는 제일 큰 사이즈로 하지요." 참... 그때는 자신감이 넘쳤다. 선생님이 조금 작은 사이즈도 괜찮다고 하셨는데, 그 말을 들었어야 했다...그렇게 얘기한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왜 그렇게 큰 걸 고집했냐고? 별 생각 없었다. 공모전 준비용이니까,, 늘 그 사이즈로 하니까.. 근데.. 이거.. 그릴 수록 뭔가 잘 못 됨을 감지했다. 그래도 뭐~ 왕 뒤에 놓이는 그림이니까 크면 클수록 좋겠지,, 완성하면 신랑 서재 뒤에 딱 걸어주면서 "열심히 일한 너! 왕이 되어라!!" 하고 외쳐주려 했었다.
그려도 그려도 끝이 안 보이는..이건 뭐지
도안은 다른 그림과 같이 쉽게 떴다. 그래서 금방 끝날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시작해 보니 일월오봉도는 손이 엄청나게 많이 가는 그림이였다. 정말 몰랐다. 화조도나 화훼도는 여백도 있고, 꽃 하나하나 피우면서 완성하면 뭔가 끝낸 기분이라도 드는데...일월오봉도는 다르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림으로 꽉 채워야 한다. 일월오봉도에 틈이 있는거 봤나? 그냥 예쁘다고만 생각했지 다시 한번 봐바라. 여백의 미 라고는 전혀 없다. 그려도 그려도 진도가 안 나간다. 산 하나 겨우 끝냈다고 생각했는데...아직 산이 네 개가 더 남아 있다. 배경도 칠해야 하고, 해와 달은 또 어떤가. 분명 동그랗게 그렸는데 볼 때마다 조금씩 찌그러져 보인다. '아니... 왜 자꾸 짜부가 되는 거지...?' 조금만 더 만지면 괜찮아질 것 같아서 계속 손이 간다. 그러다 또 찌그러지고...가까이보면 괜찮아 보였다가도 멀리서보면 또 찌그러진것 같고... 소나무는 또 왜 그렇게 많은지. 솔잎은 왜 그렇게 끝도 없이 쳐야 하는지. 솔잎을 쳐야하는데 밑색을 너무 진하게 올려서 완전 망했다 소리가 절로 나오기도 했다. 그릴 때마다 '내가 괜히 큰 거 한다고 했나...' 하는 생각이 수십 번은 들었다.
산만 봐도 민화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상한 건 그때부터였다. 일월오봉도를 그리고 있으니 화실가며 운전 할 때 신호가 걸려 밖을 쳐다보면 산이 눈에 들어오고, 나무가 들어오고.. 색감이 들어오고,, 와 저런 색감이네? 저것도 표현이 되려나? 싶은.. 예전에는 그냥 산이네 하고 지나쳤었는데 점점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와... 솔잎이 진짜 저렇게 생겼네.' 같이 다니는 친구한테도 땡땡아- 저것봐.. 저거 우리 지금 그리고 있는거랑 똑같다 그치?? 이런 얘기도 나누고.. 그땐 친구나 나나 둘다 일월오봉도를 그렸기에.. 정말.. 한숨이 절로나는 시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을 쳐다보면 '와... 산 색깔이 진짜 저렇게 변하는구나.' 를 느끼며.. 민화를 그리기 전에는 한 번도 신경 쓰지 않았던 것들이 자꾸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강원도 여행을 갔다가 내려오는 길에는 정말 동그랗고 크고 붉은 해가 산 위에 걸려 있었다.. 그걸 보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옛 선조들도 저런 풍경을 보고 일월오봉도를 그렸을까?' 그런데 그날은 미세먼지랑 황사가 조금 있는 날이기도 했다. 산이 겹겹이 뿌옇게 보이길래 신랑한테 진지하게 말했다. "선조들이 저거 보고 수묵화를 그린 거 아냐?" 그랬더니 신랑이 빵 터져서는 말했다.
"그건....아닐걸?" 그 말에 둘이 차 안에서 한참을 웃었다.
왕이 되라고 그렸는데...
몇 달을 공들여 결국 일월오봉도를 완성했다. 처음 마음먹었던 대로 신랑 서재 뒤에 놓고 "열심히 일한 너!! 왕이 되어라!" 하고 말해주려고 했다. 근데...음... 너무 크게 그렸나보다. 신랑 서재에 안들어간다.. 여기 저기 걸기가 애매한.. 너무 큰 사이즈.. 액자까지 두르고 나니 그림이 더 커졌다. 결국 지금은 벽에 걸지 못하고 그냥 세워두고 있다. 나중에 큰집으로 이사가면 걸어줘야지..
그래도 공모전에 잘 내고 상도 받은 그림이니까,, 좋은일이 많이 많이 생길거야.. 좋은게 좋은거니까...라며 애써 위안을 해본다.
일월오봉도를 그리면서 그림만 배운 게 아니라 내 주위를 둘러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졌다. 왕 초보 시절 화실쌤들이 그림그린다면서 수국보러 단체 소풍을 간다고 했었다. 그때는 꽃보러 간다고? 그냥 놀러가는거 아냐?? 라고 생각 했었다. 그저 놀고싶은 핑계에 그렇게 가는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내가 그 연차가 쌓인 화실 쌤들처럼 주위를 둘러보며 자연을 둘러보며,, 보지 못했던 색감을 찾고, 옛 그림에서 표현된 느낌을 찾고 있다. 이제야 그때 화실 선생님들이 왜 그렇게 계절마다 꽃을 보러 다녔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나는 지금도 산과 나무를 보면 그냥 지나치질 못한다. 산의 색을 보고, 능선을 보고, 솔잎을 보고... 와... 저걸 어떻게 그렸을까. 어쩔 어찌 저리 표현할 생각을 했지? 하는 의문을 가지기도 한다. 아마 민화를 그리는 사람들은 내 마음이 무슨 말인지 알 지 않을까?.

